“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상상하자”

2012.11.21 15:16

노동자대통령 조회 수:3154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상상하자”

[인터뷰] 김소연 노동자 대통령 후보...“흩어진 노동자 마음 움직이고 싶다”

 

 

 

김소연 노동자 대통령 후보에게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꿈같은 얘기가 아니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정리해고나 비정규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평범한 노동자였던 김소연 후보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걸고 18대 대선에 나선 것은 노동자의 정치가 그런 상상을 현실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김소연 후보는 자신을 ‘잘 나서지 않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참세상>이 만난 김소연 후보는 한번 활동 공간을 정하면 묵묵히 그 자리를 즐기면서 지켜왔으며, 뭔가 결정을 내리면 뒤집지 않고 끝까지 밀고 가는 스타일이었다.

김 후보는 1970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18살까지는 신분상승을 위해 대학에 가고 싶었던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19살에 정화여상 비리 재단에 맞서 싸우다 삶의 가치를 알았고, 대학에 가지 않고 의미 있는 삶을 고민했다.

그녀는 해직교사들이 만든 잡지 ‘우리교육’에서 3년을 일하다, 23살에 구로공단 노동자가 됐고, 27살엔 재밌던 일터가 어용 노조 위원장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갑을전자 노조위원장에 나섰다. 39세엔 6년 동안 투쟁으로 대법원에서조차 패소했던 기륭전자 불법파견 사건에서 정규직화를 쟁취했다.

그녀는 정치인으로 살아본 적이 없지만, 고2 때인 87년 정화여상 재단비리 투쟁에 참여할 때부터 그녀의 삶은 모두 정치였다. 김소연 후보는 갑을전자, 기륭전자 등에서 자신이 부딪혔던 문제 해결 과정에서 원칙을 배신하지 않는 끈질긴 승부사 기질을 보여줬다. 김소연 후보는 협상에서 목숨을 걸고서라도 결국 승리했고, 그건 단순한 투쟁 승리가 아닌 자본에 맞선 생명의 승리였다.

김소연 후보는 이번 대선에서 흩어진 노동자의 마음을 모으겠다고 밝혔다. 그는 “희망버스의 기적은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에 가능했고, 이번 대선도 그렇게 마음을 움직일 투쟁을 하기 위해 구체적인 전술을 고민 중”이라며 “많은 이의 마음이 모여 함께하는 싸움은 당장 승리를 못 해도 미래를 예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야권연대를 두고는 “야권과의 사안별 연대 자체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며 “주체가 무력화되고, 주체를 죽이는 상황”이라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민주당이 좌클릭 해 끌려온 것은 야권연대의 힘이 아닌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의 힘 때문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노동정치의 전망에 대해선 “소수가 하는 정당은 지금도 만들 수 있지만,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넓이도 있고 깊이도 있는 투쟁을 할 수 있는 정당을 해보고 싶다”며 “의회를 배제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의석수를 더 획득하려고 투쟁을 소홀히 하거나 우리의 요구수준을 낮추는 방식은 안 된다“고 밝혔다.

기륭투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6년 동안 김소연 후보는 투쟁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알게 됐고, 그가 대선 후보로서 가지고 있는 세상을 보는 눈이 됐다.

확실히 김소연 후보는 준비된 후보는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권영길, 심상정 등으로 대변되던 노동정치의 새로운 세대교체가 시작됐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40대 초반의 그녀는 새로운 비정규직 노동운동 세대였으며, 대공장 정규직 노조에 의해 대부분이 결정되는 노동정치 구조에서도 적당한 타협에 머무르지 않는 비정규직 운동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참세상>은 지난 16일 자정 가까운 시간에 기륭전자 노조 사무실에서 김소연 후보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종일 현장 노동자들과 만나고 다음날 새벽 울산으로 떠나야 하는 그를 붙잡고 2시간이 넘게 김 후보의 삶과 후보가 지녀야 할 자질, 노동자 대통령의 의의, 그리고 노동정치의 전망을 들었다. 한번 결정하면 밀고 나가는 그녀가 이번 대선이 끝나고 나면 어떤 모습으로 노동정치를 이끌지가 궁금하다.

아래는 김소연 후보와의 일문일답이다.


- 후보가 되고 나서 달라진 점이 있나

특별히 달라진 건 모르겠는데, 동지들이 잘 좀하고 다니라는 잔소리가 많아졌다.(웃음) 처음엔 대통령 후보가 됐는데도 평상시 모습과 다를 게 없이 다녀서 그런 것 같다. 울산 현대차 철탑 농성장을 찾아가는데 원래 (정장 같은) 옷도 없거니와 등산화에 청바지, (등산) 자켓을 입고 갔는데 모두가 잔소리했다. 저는 선거도 투쟁으로 생각하고 현장에 갔는데 ‘그래도 노동자의 얼굴인데 후보답게 다니라’며 울산 비정규직 동지들이 엄청나게 구박했다. 그리고 큰 결심했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다.

- 어떻게 결심하게 됐나

처음 동지들에게 구속되는 후보를 내고 대선 투쟁을 하자고 제가 제안을 했는데 제가 할 거라는 생각은 안 했다. 저는 지금 투쟁하고 있는 당사자 동지들이 후보를 했으면 했다. 논의 끝에 물망에 오른 분들이 집행유예 등이 있으셔서 결과적으로 제가 몫을 하게 됐다. 처음 말해 놓고 피할 수도 없고 말에 책임을 져야 했다. 이 과정이 투쟁이기 때문에 결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현장이 절박한 상황으로 나뉘어 있고, 마음이 무너져 있는데 새롭게 추스르고 모으는 과정에서 투쟁을 통해 돌파해보자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결심하게 됐다.

한번 결정하면 잘 흔들리지 않는다

- 선투본은 선거를 투쟁이라 표현하고 있다. 어떤 의미인가?

‘저를 찍어주세요. 우리를 지지해 주세요’는 수동적이다. 우리는 함께 싸우는 것을 원한다. 특별한 사람만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으로 인식되지만, 노동자의 삶을 한 번도 살지 않은 사람들에게 노동자를 대변해 달라는 것을 넘어서자는 것이다. 우리는 언론에도 봉쇄당했다. 결국 약자이기 때문에 투쟁으로 돌파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현장에 가서도 지지의 대상으로서 후보가 아닌 현장 노동자와 같은 입장의 후보가 되려고 노력한다. 김소연이 대통령 후보고, 자신이 바로 김소연 같은 느낌이다. 그런 마음으로 함께 싸우자는 의미에서 (선거대책본부를) 투쟁본부라고 했다.

- 막상 후보가 돼 보니 어떤가. 투쟁과 선거는 좀 다르지 않나

투쟁은 내 문제를 중심으로 나의 절박함을 얘기했다면, 선거는 나의 문제와 전체 노동자 민중의 문제를 모아 싸우는 것이다. 더 폭넓고 깊게 접근하는 문제인 것 같다.

- 후보로서 자신의 강점은 뭐라고 보나

과거부터 그랬지만 결정 과정까지는 여러 가지 고민을 하는데 결정하면 쭉 밀고 나가는 기조가 있다. 그런 태도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힘인 것 같다. 한번 결정하면 잘 안 흔들린다. 그래서 그 결정을 잘해야 한다.

- 그건 단점일 수도 있지 않나

그렇다. 단점일 수 있다. 저는 원래 잘 나서는 스타일이 아니다. 조용히 있다가 마지막을 책임지는 스타일이다. 정화여상 투쟁도 그랬고, 갑을전자 투쟁, 기륭전자 투쟁 모두 그랬다. 갑을전자 때도 조용히 즐기면서 노조활동을 했는데 마지막을 지켰고, 기륭 같은 경우는 제가 하자고는 했지만, 그것도 3년 동안 일하면서 마지막에 제가 제안해서 노조를 만든 것이다. 그 3년 동안 고민이 많았다. 잘 될까 이런 고민 속에서 마지막을 책임지며 결단해왔던 것 같다. 단점일 수는 있는데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그런 걸로 위안 삼고 있다. 돌이켜보니까 운이 약간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후보로서 부족한 점이 있다면

부족한 것은 많다. 하지만 비교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다르다. 문재인, 안철수, 박근혜와 비교하면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운동하는 동지들과 비교하면 부족함이 많다. 말도 빠르고.(웃음. 인터뷰 전에 동행팀장이 말이 빠르다는 지적을 했다.)

제가 잘나고 능력이 있어서 후보가 된 게 아니다. 우린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과 힘을 모아야 한다. 부족함이 독선적으로 가지 않는 부분에선 장점일 수도 있다 생각이 든다. 조직적인 뒷받침이 중요하다.

- 준비되지 않은 후보다. 제도권 정치인이라면 권력의지가 중요한 덕목이겠지만, 노동자 대통령 후보로서의 각성이랄까, 지금부터 대선 공간에서 그려나갈 후보로서의 자신을 설명한다면

시작부터 얘기한 건데 대선 공간에서 분열되고 무너진 현장 조합원과 미조직 노동자의 마음을 모아나갈 것이다. 그게 제 몫인 것 같다. 그걸 위해 온몸을 다해 싸우고 함께 실천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럴 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가장 어려운 곳에서 단결과 연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도흠 민교협 공동대표가 10만 촛불 때 “우리 몸 중 제일 중요한 부위는 머리도 가슴도 아닌 상처”라고 했다. 아픔 때문에 신경이 집중되는 곳부터 출발하자는 것이다. 제가 그 아픈 마음을 겪었고, 아파하는 많은 사람과 함께 아파만 하지 않고 극복하는 투쟁을 하자고 호소하면 공감할 것으로 생각한다. 제 몫은 거기에 있다.

- 마음을 모으자는 것만으로 뭘 이룰 수 있나

희망버스 때 김진숙을 살리자는 그 마음이 통했던 것처럼 마음을 모으고 단결해서 싸워야 한다. 대선을 앞두고도 고통받는 분들이 많다. 얼마 전엔 장애인 두 분이 돌아가셨지만, 시민은 잘 모른다. 저도 기륭 투쟁을 하면서야 장애인 이동권에 관심을 뒀다. 그전까지는 제 주변의 문제라고 생각도 못했다.

투쟁하기 전엔 제 눈에 장애인이 안 보였다. 투쟁하고 연대하면서 이주노동자, 철거민, 장애인이 보였다. 그래서 저에겐 기륭 6년의 투쟁이 소중한 경험이다. 그런 투쟁을 하며 많은 아픔을 봤고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근본적으로 확 바뀐 것은 아니지만, 투쟁하고 저항하는 사람이 있기에 바뀌어왔던 역사가 있다. 희망버스의 기적은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에 가능했고, 이번 대선도 그렇게 마음을 움직일 투쟁을 하기 위해 구체적인 전술을 고민 중이다. 정치 희망버스를 얘기했는데 마음이 움직여야 그 버스를 탈 것이다. 많은 이의 마음이 모여 함께하는 싸움은 당장 승리를 못 해도 미래를 예비할 수 있다.

- 투쟁은 굳이 대통령 후보가 아니어도 할 수 있지 않나

일부에선 그런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시기란 게 있다. 대선 정치공간에서 후보를 내고 싸운다면, 더 많은 접촉면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4.11총선 때 현안 투쟁을 이슈화해 보려 했지만, 전혀 이슈화되지 않았다. 한계가 있었다. 후보와 함께 싸울 때 훨씬 확장될 수 있다. 많은 돈이 들어가는 만큼 더 절박하게 할 것이다. (웃음)

대선 이후엔 싸움을 안 할 거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이게 토대와 씨앗이 될 것이다. 이 힘을 바탕으로 2013년 투쟁을 밀고 가야 한다.

단식 60일째 중단시키려 찾아온 이소선 어머니 생생


- 다른 후보들은 오랜 정치인 생활로 많이 알려졌는데 김소연 후보 개인에 대해선 알려진 게 많지 않다. 본격적으로 개인사에 관한 얘기를 해보자. 살면서 미운 사람이 있었나

고등학교 다닐 때 제일 미운 사람이 교장 선생님이었다. 그 시절에 비리 재단 문제를 비껴가려고 쓰려져서 쇼하고 그랬다. 119를 불렀는데도 우리가 믿지 않자 누운 채로 소변을 보더라. 병원으로 간다고 했는데 확인해 보니 가지 않았더라. 저는 원래 사람을 특별히 싫어하지는 않아서 그 외에 싫은 사람은 별로 없다.

- 기륭 사측은 밉지 않았나

그렇게 밉진 않았다. 생각 자체를 안 해서 그런지 싫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들었다.

- 살면서 가장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면

기륭 투쟁 당시 이소선 어머니(전태일 열사 어머니)가 단식 농성장에 올라오셨을 때가 가장 기억난다. 단식 초반에 오셨다. 그때 우리가 시너 같은 뭔가를 가지고 농성장에 올라갔다는 소문을 듣고 오셨다. 어머니께서 시너가 있나 농성장을 뒤집고 난리가 났다. 당시 저희가 단두대 같은 것을 옥상에 설치했는데 어머니가 단식을 말리진 못하고 단두대만 자르고 가셨다.

또 단식 60일 때 두 번째로 추모연대 분들과 강제로 저를 제압해서 끌고 내려가려고 연습하고 오셨다고 들었다. (웃음) 어머님이 저를 만나셨는데 단식을 중단하라는 말씀은 결국 못하셨고 다만 “태일이 하나로 족하니까 살아서 싸우자” 그 말씀만 하고 내려가셨다. 어머니가 판단하신 거다. 단식을 중단해라 말해서 되는 상황이 아니란 것은 어머님의 긴 시간의 경험으로 아신 것 같았다. 그때 어머니께 감사했다. 그리고 송경동 시인 등 기륭 천일 투쟁 때 천군만마가 됐던 많은 분에게 감사하다.

- 어릴 때 얘기를 해보자. 어떤 집안이었고, 가족관계는 어땠나

우리 집은 딸 셋을 낳고 아들을 낳으려고 하다 쌍둥이를 낳아 5남매가 됐다. 그중 내가 첫째다. 작은 집에 일곱 식구가 오밀조밀 살았다. 방 하나에 가로 세로로 누워 잤다. 어머니는 집이 어려워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화장품 장사를 시작하셨고, 그때부터 학교에 다녀오면 제가 밥을 했다. 아버지는 금고 관련 기술이 있으셨다. 나중에 보일러 시설관리 일을 하셨다.

- 후보로 나간 건 부모님도 아시나

이제 아신다. 어머님은 이것도 투쟁이라 생각해서 별말씀 안 하신다. 몸 축나지 않게 하라는 얘기 정도만 하셨다.

신분 상승 위해 대학에 가고 싶었던 고등학생

- 어릴 때 꿈은 무엇이었나

제 꿈은 재미없다. 옛날엔 다 똑같았다. 선생님, 간호사 이런 꿈인데. 식구도 많고 막내와 여섯 살 차이가 나서 늘 집이 북적거리니까 내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학교 2학년 때 독서반에 들어갔다. 방학 때 학교 가서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난로도 떼고 그런 게 보장돼서 독서반을 했다. 그래서 꿈은 당연히 대학에 가는 것이었다. 나름 신분상승의 꿈이 있었는데 그렇게 못 했다.

- 대학생이 무척 되고 싶었나 보다

대학생이 되고 싶다는 것보다는 대학에 가는 걸 신분 상승과 가난 탈피의 전제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선생님이나 간호사가 되고 싶었다.

- ‘나 여성노동자’라는 책을 보면 “원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싶었고, 가정 형편상 상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정화여상 가서도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1학년 때 부기 2급에 합격하고, 2학년 때 1급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학이 절실해 보였다. 살짝 악바리 느낌도 있다

그때는 상고에 가고 싶어서 진학하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보통 상고 가는 친구들은 집안이 어려워서 가는 일이 많았고 대부분 대학에 가고 싶어 했다.

- 대학에 가고 싶다는 마음은 언제 접었나

정화여상에 가서도 한동안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상고라 수업 과목 수도 적고 공부를 열심히 안 가르치는 데 불만이 많았다. 그런 생각을 접은 건 고2 때 재단비리 투쟁 때문이었다. 그 투쟁을 하면서 꼭 대학에 안 가도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의 전환이 있었다. 살아가는 삶의 가치가 바뀌었다. 원래 어릴 때 겪은 일의 충격이 더 크지 않나.

- 삶의 가치가 상당히 일찍 바뀌었다

그때 ‘내가 두고 떠나온 아이들에게-해직 교사들의 못 다한 수업’이란 책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당시 해직교사인 김진경 선생님 등이 쓰신 책인데 학생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학교 비리가 우리 학교와 너무 닮아 있었다. 비리재단 싸움이 시작되고 나서 책도 많이 돌려보고 토론도 많이 했다.

그리고 고3 때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란 책을 읽은 게 제일 충격이었다. 그 책을 읽고 가난은 부모가 못나거나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란 걸 느꼈다. 어릴 때 읽은 책이 제일 기억에 많이 남나 보다. 그 책들이 영향을 많이 줬다.

- 이력 중에 정화여상 졸업하고 전교조 해직교사가 만든 우리교육이란 잡지사 근무가 3년이나 된다. 정화여상 투쟁의 영향인가

우리교육에서 잡지를 처음 만드는 데 일손이 필요하다고 해서 가게 됐다. 함께 싸웠던 선생님 중에 전교조 선생님이 계셨고 그분의 소개를 받았다. 의미도 있고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정도로 생각했다.

창간호부터 출발을 같이 했고 제가 만들어가는 일이어서 재밌었다. 그때 서울지역 출판노조 분회를 결성해서 내가 최연소 분회장을 했었다. 그땐 노동을 잘 몰랐고, 현장 취업 나간 친구들이 커피나 담배 심부름, 청소, 성희롱 등으로 많이 싸우는 것을 보고 그런 것에 저항해야 한다며 후배들을 데리고 교육도 하고 그랬다.

- 우리교육을 그만둔 이유는

출판노조 활동도 했지만, 3년을 일하면서 이게 아주 의미 있는 일이란 생각이 안 들었고 다 비슷한 집단이라 제한적이었다. 현장에 가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구로공단을 찾았다.

- 현장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왜 들었나

정화여상 졸업 후에 친구들이랑 자발적으로 모임 같은 걸 하면서 독서토론이나 시사토론을 하고 집회도 다녔다. 그러면서 내가 주체가 돼서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까지는 아니었지만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고민이 있었다. 그게 결국 노동현장이고 노조활동으로 세상을 바꾸는 활동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고민이 있었다. 당시 현장투신이라는 말이 많았는데 고등학교 때 활동했던 애들도 현장투신이란 말로 공단에 많이 왔다. 저야 집이 어려워서 계속 일을 해야 했고 부모님 생활비를 대야 하는 조건이라 돈도 벌면서 의미 있는 일을 찾은 거다.

- 당시 구로공단은 어떤 곳이었나

92년 가리봉역(지금의 가산디지털단지역)에 내렸을 때 신입사원 모집 공고가 많았다. 조금 두리번거리니 봉고차가 다가와서 좋은 데가 있다고 데려갔다. 처음에 인신매매범인가 생각했다. 그때 간 게 갑을전자였다. 3교대 사업장이라 밤새워 일한다는데 밤을 새우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 못 할 것 같았다. 무섭기도 했고, 그래서 주간조만 근무하는 사업장에 가서 6개월 동안 일을 했다. 그때 동료들과 여의도 공원에 자전거를 타러 한 번 갔다가 몇 시간 동안 취조당하는 일이 있었다. 자전거를 타러 간 동료 중 한 명이 학출(학생운동 출신)이었던 거다. 회사가 어떻게 알고 노무관리를 심하게 했다. 늘 감시당하는데다 제 또래도 많지 않아 기륭전자로 옮겼다.

- 기륭 유흥희 조합원과는 정화여상 투쟁 때 만난 20년 친구라고 들었다. 지금도 같이 산다고 들었다

계속 같이 산 건 아니다. 그전에 같이 살다 헤어졌고 제가 기륭에 올 무렵 유흥희 조합원은 다른 현장에서 일하다 일명 ‘대청소해고’를 당했다. 놀고 있길래 우리 회사로 오라고 해서 우연히 오게 됐다. 그때 회사에서 친구 집이 멀어서 다시 같이 살게 됐다.

진짜 목숨을 걸었던 기륭 투쟁


- 1,895일을 싸우고 정규직화를 쟁취한 기륭 투쟁 얘기로 가보자. 중간에 투쟁을 중단하고픈 유혹은 없었나

그런 적은 없다. 다만 힘들었던 적은 있다. 원래 힘들어하거나 하는 성격은 아닌데 2006년 투쟁 때는 힘들었다. 조합원들이 돈이 없어서 농성장까지 걸어서 다녀야 했고, 투쟁도 잘 안 됐다. 어떻게 돌파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힘들었다. 그때 빼고는 그냥 쭉 투쟁했다.

94일 단식할 땐 많은 이들이 단식을 중단하라고 하고 투쟁은 혼자 하는 게 아닌 조직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리기도 해서 그런 부분이 어려웠다. 그분들 말이 맞기는 한데 투쟁 주체인 조합원들은 절박하니까 목숨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단식 67일 차 때는 ‘혼자 그렇게 하는 것은 소영웅주의 아니냐’는 욕도 먹었는데 별로 개의치 않았다. 내가 절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94일 단식하고 끝내 해결이 안 됐다. 조금만 더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는데 94일 단식이 끝나고 나서는 그 말이 안 나왔다. 그 상황 자체가 힘들기도 했다. 그때부터는 ‘우리의 싸움이 정당하니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자’고 얘기했다. 떠나는 동지들에게 ‘조금만 더 해보자. 내가 책임질 테니 너 끝까지 있어라’ 이렇게 얘기가 안 나왔다.

그러면서 대정부 투쟁에 집중했다. 기륭투쟁의 의미는 법과 제도의 문제라고 보고 파견법의 가장 큰 피해자인 우리가 사회적 울림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광화문에 나가서 일인시위를 하고 청와대 투쟁을 계속했다.

- 파견법이라는 테두리에서 기륭 싸움은 답이 안 보였다. 그런데도 그렇게 투쟁한 원동력은 무엇인가

조합원들의 요구가 있었다. 현장 조합원들이 해고를 당하지 않으려고 노조를 만든 건데 계약해지로 해고를 당하고, 1년 미만자 모두 해고된다는 얘기가 들리니까 조합원들이 저에게 결단을 요구했다. 컨베이어에 앉아 있으면 조합원들에게서 쪽지가 왔다. ‘어떻게 할래, 해고당하고 싸울래? 해고당하기 전에 싸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등의 내용이었다.

그때도 우리가 안 싸운 건 아니었다. 1인 시위도 하고, 아침점심저녁으로 집회를 계속했다. 하지만 회사는 그런 걸로는 꿈쩍도 안 했다. 노동부가 해고 중단 공문도 보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불법파견이라는 인정을 받았지만 법으로는 고용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결국 투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현실을 알고 있었지만, 현실을 근거로 판단하면 어떤 싸움도 안 되는 조건이었다. 결국 법을 넘어서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투쟁이 시작됐고, 저희는 그때부터 (파견)법을 무시했다.

다만 아쉬움이 남는 건 어차피 법이 우리를 보호하지 못하기 때문에 투쟁에만 집중하자면서 소송엔 신경을 쓰지 못한 부분이다. 저의 경우 계약직으로 3년을 일했는데 법원에서 승소할 가능성도 있었다. 지노위, 중노위에선 제가 이겼는데 행정법원에 가서 졌다. 저라도 이겼으면 기륭 사측에 부담이 컸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 현재 사회적 분위기에서 3년 계약직이면 무조건 법원에서도 이기는 것 아닌가

제가 1년씩 재계약을 하다 마지막엔 6개월씩 재계약을 했다. 결혼을 안 했다는 이유로 사측의 요구로 그렇게 재계약을 했는데 그걸 충분히 규명하지 않았다. 법원은 그걸 두고 제가 계속 근로의 기대가 없었다고 했다. 그때는 판결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나오지 않고 보수적으로 판결이 나오던 때라, 대법원까지 다 져도 충격을 받지 않았다. 조합원들에게도 법이 보호를 안 하니 싸울 수밖에 없다고 했고, 그래서 법을 개의치 않고 싸웠던 것이다.

투쟁력으로 본다면 저희는 집중력도 있고 결속력이 좋았다. (상급단체에서) 조금만 받쳐줬으면 충분히 초기에 돌파구를 열고 해결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정규직과 함께 노조를 만들었고, 불법파견을 인정받은 조건이라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제 잘못도 있다. 현장에 있으면서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고 상급단체와의 소통을 직접 할 생각을 안 했다. 금속노조 지역지회도 있고 해서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더 적극적으로 상급단위를 조직하지 못했다. 우리만 열심히 잘 싸우면 시스템이 잘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충분하지 않았던 것 같다.

- 94일간의 단식 외에도 몇 번의 단식이 있었는데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나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2006년 30일 단식 때는 끝장내자는 게 아니었는데, 천일 전에 현장으로 돌아가자며 시작한 2008년 94일 단식은 달랐다. 06년은 교섭을 시작하는 것에 집중했다면, 천일 투쟁 단식은 이게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했다. 개인적으로 해결이 안 되면 죽는다는 생각도 했었다. 당시에 단식 들어가면서 살아서 땅을 밟지 않겠다고 했다. 그냥 한 말이 아니고 진심이었다.

게다가 06년 30일 단식 경험이 있어서 기본으로 30일은 넘겨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 전에 30일을 했기 때문에 회사도 30일은 넘겨야 긴장이 걸린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렇게 오래 갈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 94일 단식 중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였나

함께 단식하던 유흥희 조합원이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다. 의사 소견으로 폐에 물이 차는 것 같다고 했다. 잠을 못 자고 눈빛이 달랐다. 눈이 흔들렸다. 저러다 진짜 사람 하나 죽이겠다 싶었다. 저의 문제는 감수하겠는데 옆 동지가 그런 건 볼 수 없었다. 67일 때 농성장에서 내려왔다. 그 동지만 내려 보내려고 했는데 죽어도 같이 안 가면 안 간다고 해서 내려갔다. 그래도 단식을 풀 수가 없었다. 그 상황에서 단식을 풀면 상황은 더 악화 될 거로 생각했다. 병원에 있는데 여러 소식이 들려왔다. 기륭 사측이 버티고 우리 내부의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이었다. 링거 병을 꽂고 다시 농성장으로 갔다.

저는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 요구가 무리였는지는 모르지만 당사자가 절박하게 어떻게든 싸움으로 돌파해보자 하면 상급단체는 그 투쟁이 잘되도록 뒷받침하고 함께해 주는 게 필요하다. 하지만 제 생각과 많이 달랐다. 많은 분이 해결사적 관점만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당시 민주노동당도 그랬고 (상급단위) 노조도 그랬다. 물론 그분들 마음은 안다. 너무 고통스럽고 고생하니까 해결하자는 관점은 아는데 그게 투쟁주체에 힘을 주기보다는 어려움을 주는 것 같다. 제 장점이 잘 버티는 거라고 했던 게, 단식 60일 때 농성장에 올라와서 낮은 수준의 합의안이 나와 어떻게 할지 논의가 있었다. 저는 조합원의 의사를 따르겠다고 했는데 조합원들의 마음이 저와 같았다. 그게 끝까지 투쟁하는 힘이 됐다.

많은 중재안 거부... 흔들리지 않는 승부사 기질

- 94일 단식 당시 이정희 전 민노당 의원이 중재했는데 그 중재안도 거부한 것으로 안다

그때 이정희 의원에게 진정성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저희 문제로 12일이나 직접 단식을 하고 교섭중재도 들어왔다. 60일 합의안 논의 때 이정희 의원도 있었지만, 조합원들은 굴욕적 합의는 못한다고 했다. 이정희 의원도 그때 같이 울며 제발 살아달라고 호소했다. 지금도 이 의원의 진정성은 감사하다. 문제는 이정희 의원이 교섭에 들어왔을 때 의원이다 보니 회사 측과 노조 측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양쪽이 양보해서 중재를 해보자는 건데, 우린 제일 핵심적인 것을 양보할 수는 없었다. 그것 때문에 싸워온 건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저는 그게 이정희 의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상급단위 노조의 입장이었다고 본다.

- 최동렬 기륭 회장이 최종 합의 며칠 전 국회에서 만난 자리에서 그동안 의견접근을 이룬 안을 뒤집으려 할 때 오히려 그 판을 깨고 나오려 했다는 에피소드도 들었다. 그때 그 자리에서 뛰쳐나가면 또다시 몇 년을 더 투쟁해야 한다는 두려움은 없었나

오로지 분노만 있었다. (웃음)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저희가 그냥 1,800일을 싸운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 거짓이 진실을 이길 수 없다는 것 하나였다. 그런 희망이 없으면 그냥 폐인처럼 살게 될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때 굉장히 분노했고. 협상 판이 깨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 나름 승부사 기질이 있는 것 같다

그런 게 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가 옳으니까, 너무 선명하니까, 할 수 없는 거였다. 그때 책상을 뒤집고 나오고 싶었는데 책상이 무거웠다.(웃음) 뛰쳐나가려는 것을 함께 온 동지가 말려서 참았다.

- 회사와 최종합의를 할 때 심정은 어땠나

진짜 많이 울었다. 국회에서 도장을 찍었는데, ‘이 종이 쪼가리 하나 받으려고 그 세월 동안 많은 조합원을 떠나보내면서 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싸우던 조합원이 다 복직됐으면 달랐을 텐데 마지막 남은 10명의 복직만 합의했다. 당시 남은 조합원이 32명이었는데 사직서를 내지 않고 적을 둔 상태에서 생계를 돌봐야 했다. 회사는 강경했고, 정규직화라는 의미가 있어서 합의했지만 진짜 속상했다.

- 20대 초반에 갑을전자에 입사해 27세에 노조위원장을 맡고, 이어 기륭전자에 입사해 나중엔 노조를 이끌었는데 비교적 젊은 나이에 노조위원장을 맡았다. 리더십 같은 게 몸에 배어 있나보다

리더십이 있는 건 아니고 제가 인복이 있는 것 같다. 늘 일터에 있는 게 신 났다. 저는 회사에 출근하는 게 한 번도 괴로운 적이 없었다. 동료들과 같이 지내는 게 너무 즐거웠다. 기륭에서도 출근이 괴로운 적은 없었다. 일은 힘들었을지 모르지만, ‘출근하기 싫어’ 이런 마음은 없었다. 일터에 가면 동료들과 얘기하고 술도 먹으러 가고 이런 게 좋았다. 저는 술을 먹으러 가도 두세 명만 가면 재미가 없다. 집단으로 가서 떠들고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

- 중선관위 정보를 봤더니 예비후보자 중 가장 젊다. 1970년생에 만 40살이던데 결혼 생각은 안 해 봤나

살면서 너무 바빴다.

- 결혼할 기회는 없었나

팬들은 많았으나, 한 명을 선택하면 실망하기 때문에. (웃음) 주변에선 외롭지 않아서 그런다고 하는데 살면서 외로운 적이 없어서 외롭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 기륭 투쟁 당시 프러포즈를 받았다는 소문이 있더라

제 앞에서 말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 2009년 파리 OECD 각료회의 개막 행사장에서 현수막 시위를 한 최초의 노동자 중 하나였다고 들었다

OECD 각료회의에서 당시 한승수 총리가 개막 연설을 할 때 저와 함께 간 두 분이 품에 접어들고 갔던 현수막을 펼쳤다. 경호원들에게 끌려나왔는데 제가 제일 발악을 했나 보더라. 국제노총 분들이 저에게 제발 순순히 끌려나와 달라고 부탁했다. 국제노총 분들이 매우 곤란해 했다.

- 당시 총회장에서 항의할 때 함께 갔던 한 비정규직 활동가와 연애관계로 연결시켜주려던 분 말로는, 한국에 돌아와서 ‘그는 대가 약해서 안 돼’란 얘길 했다는 일화도 있던데

(웃음) 저를 연결해 주려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분이 대가 약했다고 한 건 사실이다. 이 얘기 나가면 안 되는데... 전날 밤 현수막을 들기로 결정해놓고도 연행하면 어떻게 할지 등을 묻는 것이다. 연행되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는데, 다음 날 아침에도 또 얘기하길래 “한번 얘기하면 끝이지 얘기하지 말자”고 했다.

- 정말 한번 결정하면 고(GO)하는 스타일이다

결정했으면 하는 거죠.


“민노당은 정파가 만든 당 아닌 민주노총이 만든 당이었다”

- 노동정치 얘기로 가보자. 민주노동당에 가입해 오랫동안 당원이었다. 당에 가입한 계기는 뭔가

96~97년 총파업을 겪고 김대중 정부 들어와 정리해고와 파견제가 통과된 것에 굉장히 분노했다. 노동자 국회의원을 한 명이라도 만들자는 민주노총의 전술에 동의했다. 민주노총이 만든 민노당을 우리의 당이라고 생각했다. 그땐 강령이 뭔지도 잘 몰랐다. 그냥 같이 투쟁했던 상급 단위가 만들었으니 신뢰했고 우리 당이라고 생각했다.

- 참여당과의 합당 저지 때만 해도 민노당에 상당한 애정이 있었던 것 같다

민노당엔 계속 애정이 있었지만 약간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선거나 사안이 있으면 투쟁은 같이 했고, 당의 방향에 관해선 얘기하거나 주장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진보신당과 분당 때 굉장히 속상했다. 기륭투쟁 중이었는데 저는 분당에 반대했다. 모두 소중한 동지들인데 안타까웠다.

-진보신당이 들으면 서운해할 수도 있겠다

섭섭할 수 있는데 솔직하게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당의 충격이 현장에선 컸다. 당의 분열이 노동자의 분열까지 불러왔다. 많은 동지가 저를 엔엘(NL)로 분류했다고도 하고, 어떤 때는 피디(PD)로 분류했다고도 하는데 저는 정치적 입장을 얘기해 본 적은 없다. 저도 모르게 분류돼 있더라.

그리고 진보대통합을 기대하기도 했다.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국민참여당과 통합을 한다는 거다. 민노당 당대회에서 국참당과 합당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강령에서 ‘사회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삭제했다. 제가 ‘사회주의의 이상과 원칙’이라는 조항 때문에 그 당에 간 건 아니지만, 있는 걸 삭제하는 건 후퇴라서 반대했다. 사안별로 (자유주의 세력과) 연대는 할 수 있다고 보지만 한 식구가 되는 것은 다르다.

국참당은 반성하지 않았고, 지금도 당시 비정규직법은 최선이었다라고 얘기한다. 그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죽어갔는데 반성이 없다. 그래서 탈당한 거다.

- 우리교육이나 민노당은 상대적으로 노동운동 우파적 흐름이 강했고, 현재는 노동운동 좌파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노동자 대통령 선투본에 함께하는 변혁모임이나 사노위(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실천위원회)를 극좌파라고 까지도 지칭하는데 의식의 흐름을 보면 정치적 갭이 있을 수도 있어 보인다

민노당에 들어갈 때는 특정 정파가 만든 당이 아니었다. 지금 변혁모임을 같이하는 분 중에는 민노당을 거친 분들이 많다. 민주노총이 만든 당이기 때문에 함께한 것이다. 소위 경기동부는 나중에 대거 민노당에 들어왔다. 거기에 문제의식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 들어오게 막을 일도 아니다.

민노당이 전혀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04년 이후 우경화 흐름으로 갔다. 그렇다고 그만두면 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당이 우편향으로 가면 문제제기를 하면 된다. 생각이 다르다고 떠나는 건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아 있었다. 그런데 국참당 문제는 질이 다른 문제다. 당의 성격 자체가 달라지는 거다. 저는 탈당이 아니라 그들이 저를 밀어낸 것이라고 본다.

물론 현재 제가 몸담고 있는 이 흐름은 그동안 만나보지 못한 동지들이다. 사노위든 노동전선 동지들이든 굳이 어디 소속인지 알면 뭐 할 거며, 함께 싸우는 건데 어디는 어떻고 이런 얘기는 않는다. 우리가 얘기하는 기조인 노동자 중심의 노동정치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통진당(통합진보당)이나 진정당(진보정의당)이 노동중심이라고 하는데 이들과 변별력을 가지려면 그냥 노동중심은 한계라고 느꼈다. 개인적으로 노동자 계급정당이란 말을 할 때, 계급이란 말을 써야하나 라는 생각도 했다. 저는 선언적 계급이 아닌 귀결적 계급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괜히 문턱만 높여서 되겠냐는 고민도 있었지만 그들과 변별력이 없다. 그래서 조금 더 분명히 하자고 했고, 더 이상 제기하지 않고 동의하고 가고 있다.

또 하나는 그동안 투쟁은 결국 자본과의 싸움이었다. 대공황이 오고 모든 사람이 자본주의를 극복하자고 하는데, 당장 사회주의를 내걸지는 못해도 사회주의 이상과 원칙까지는 합의할 수 있다고 본다. 변혁적 현장실천과 노동자 계급정당, 자본의 선을 넘자는 반자본주의 정도가 얘기되는데 여기 동의하는 사람들이 다 같이하자는 것이다. 그 출발이 투쟁하는 현장노동자였다. 어떤 정파가 이걸 해보자고 해서 모이는 게 아니라 현장 동지들이 새롭게 해보자는 것이 출발 지점이다. 여기에 사노위든 노동전선이든 동의하신 분들이 함께한 것이다. 특정 정파의 동지들만 함께하는 그런 게 아니다. 새로운 틀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우리가 분단국가이기 때문에 분단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에 다 관심을 두고 두 모순을 함께 풀어야한다. 그러나 민족모순을 정주영의 관점에서 풀 수는 없다. 당연히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풀어야한다. 참고로 저는 좌파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정 정파를 표현할 뿐 정말 계급을 표현하는 단어인지는 고민이다. 또한 우파라고 다 어용이라고 보지도 않는다. NL이 어용은 아니다. 좌파냐 우파냐 이런 표현은 개인적으로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고 본다.

- 기륭 합의 당시 민주당이 뒤에서 많은 도움을 줬다고 들었다. 또한 총선 전까지만 해도 정동영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친노동 행보는 진보정당 의원들보다 더 진정성과 파괴력이 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노동과 민주당의 관계는 단순히 신자유주의 세력이라고만 하기엔 훨씬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본다. 차라리 정동영 같은 의원들을 통한 민주당 견인론이 더 나은 전술일 수 있지 않나. 대선도 마찬가지로 일종의 야권연대 전술을 통한 견인적 사고로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태생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정동영 의원의 행보는 정말 진정성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정동영 의원 개인이다. 민주당의 당론이나 전체 결의를 통해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은수미 의원이나 장하나 의원이 열심히 하지만 개인의 의견일 뿐 그 당 전체가 뭔가 바뀐 게 아니다. 그렇다면 문재인 후보가 구로디지털단지 와서 하는 간담회에서 고통분담 같은 얘기를 못 할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당의 정체성 문제라 할 수 있다. 공당이 투쟁하는 노동자를 지지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한다. 저희가 야권연대를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그들이 당연히 해야 할 몫이다.

- 한미 FTA 같은 경우 야권연대를 매개로 민노당이 전술적으로 민주당에 긴장감을 거는 측면도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저는 야권과 연대 자체를 반대하는 게 아니다. 사안에 따라 연대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투쟁 주체가 무력화되는 방식이다. 거의 주체를 죽이는 상황이다. 민주당이 좌로 끌려오는 것은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이 있기 때문이다. 진짜 민주당이 좌클릭을 했다면 적어도 민주당이 잡고 있는 지방정부 투쟁 현안에 관해 책임을 져야 한다.

- 일각에선 본선에 등록할 수 있느냐가 많은 관심거리다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게 속상하기도 한데, 저희의 진정성이 통할 거라고 생각한다. 개인 김소연의 결의로 내가 하겠다가 아니고 함께 투쟁했던 동지들이 대선에서 싸워보자고 결의해서 마음을 모았다.

희망버스 때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들 뭔가 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김진숙 지도위원이 목숨을 걸고 싸우니까 마음이 움직이고 함께했다. 이번 대선도 굉장히 절박한 정세라고 본다. 새로운 희망을 만들고 토대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저희가 진심과 온몸을 다해서 싸우면 마음이 통할 것이다. 그 힘으로 본선에 등록할 거라고 생각한다. 최선을 다해 조직화하고 싸울 것이다.

- 이후 변혁적 계급정당의 상은 좀 그리고 있는가

더 많은 사람과 열린 자세로 노동자계급중심 투쟁정당을 만들어야 한다. 논의했던 틀만 아니라 더 넓은 틀을 만들고 함께해나가기 위해서 대선 때 마음도 모으고 신뢰도 쌓아야 한다. 사람은 말로만 하면 믿지 않는다. 문제에 부딪혀 보면 말로만 하는 사람인지 온 힘을 다하면서 가는지 알 수 있다. 그런 진정성을 토대로 2013년을 거치면서 당 건설로 나가야 한다. 지금 변혁모임은 대선 사안만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런 논의를 출발시켜서 더 확산해 나가자는 게 목표다.

오늘 오후에 만난 진보신당 당원이라는 분이 함께 싸우겠다고 하시면서 진보신당과 함께할 수 있느냐고 묻더라. 당연히 투쟁하는 정당을 만들고 변혁을 하겠다면 다 같이 해야 한다. 진보신당 동지들이 사회연대후보를 낸다고 했을 때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 큰 조직력을 가진 동지들이 자기의 어떤 것을 내려놓은 것이다. 기득권이 될 수 있는 것을 내려놓은 이유가 더 많은 동지와 함께 하겠다는 진정성이라고 봤다.

충분히 많은 논의를 거쳐 이런 고민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하나가 돼서 싸워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수가 하는 정당은 지금도 만들 수 있다.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넓이도 있고 깊이도 있는 투쟁을 할 수 있는 정당을 해보고 싶다. 그렇다고 의회를 배제하자는 것도 아니다. 의석수가 있으면 좋지만, 의석수를 더 획득하려고 투쟁을 소홀히 하거나 우리의 요구수준을 낮추는 방식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

- 노동계 상황과 진보정당이 정파별로 갈라진 상황에서 유의미한 득표율은 어려워 보인다. 이번 선거의 목표가 뭔가

선투본 공식 입장은 표에 대한 목표는 두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묻는 분들이 많아 최소한 백만 표는 얻겠다고 했으나 표가 중요하지는 않다. 우리 얘기와 울림이 얼마나 확산했는지가 잣대인데, 표는 열심히 투쟁해서 함께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생각한다. 누가 당선되어도 노동자를 무시할 수 없는 그런 세력이 되도록 해야 한다.

- 앞으로 노동정치 전망과 각오는

저는 원래 근시안적이다. 당면한 문제부터 잘해보자는 게 있다. 많은 분들이 우려도하고 의구심도 보내지만, 가능하다는 희망을 품고 함께 투쟁해야 미래가 있다. 지금 될 수 있을까 하면서 포기한다면 미래를 지우는 것이다. 우리가 소수일지는 모르지만 소수가 저항하고 확산하는 과정에서 세상이 변했다. 자본주의 최대 위기가 우리에겐 기회가 될 수 있도록 투쟁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연대해서 위기를 돌파해 나갔으면 좋겠다.

제가 기륭투쟁이 끝나고 쿠바에 간 적이 있다. 국민소득은 우리보다 적은데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하고 있었다. 사람은 아무리 어려워도 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할 수 있다. 꿈같은 얘기가 아니다. 우리 정치도 그래야 한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꿈같은 얘기가 아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정리해고나 비정규직은 없었다. 물론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어져도 노동해방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첫 번째 과제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 가능하다는 낙관을 하고 이번 대선투쟁을 잘해서 2013년 투쟁을 힘 있게 열어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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